<혼 불-빛의 회오리>, 캔버스에 유채, 194x261.5cm, 1989 Ⓒ국립현대미술관
글. 김태현 미술 비평, 전시 기획 elizabeth0711@gmail.com
미술과 종교
전 세계적으로 전염병이 유행하는 지금, 한국을 비롯한 세계 각지의 국가에서 공통적으로 ‘모임’을 갖지 말고 ‘사회적 거리 두기’를 권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전염된 경로 중 하나는 종교 활동이다. 왜 인간은 전염병이라는 절체절명의 상황에 국가의 권고를 무시하고 모임을 지속하는 걸까? 물론 개개인이 느끼는 이 질병에 대한 절박함의 차이에서 기인하는 것이기도 하나 아마도 인간의 불안한 심리가 이를 더 자극했을지도 모르겠다. 과거 미술사에서는 종교가 중요한 역할을 차지했다. 그러나 과학과 의료의 발달은 종교의 힘을 약화시켰고, 미술에서 종교가 차지하는 비중도 줄어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사다난한 한국의 근현대사 속에서 지속적으로 자신과 주변을 탐구하고 또 여러 종교적 믿음에 기대어 살아간 미술가, 하인두가 있다.
고난과 역경의 시대를 살아내다
셋째 아들로 태어난 하인두는 어린 시절 형의 말더듬이를 흉내내다 자신도 모르게 말을 더듬는 습관이 익숙해져 버렸다. 이는 다소 내성적인 성향의 본인에게 큰 스트레스로 다가왔으며 말더듬이를 극복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다고 한다. 또한 예민하고 섬세한 기질이 있었으나,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은 해내는 굳은 결기를 가지고 있었다. 하인두는 남관의 화실에서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고, 홍익대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한국 전쟁의 발발로 부산으로 피난을 가며 생사를 오가는 지옥과 마주하였다. 당시 부산에는 서울 주요 대학의 연합 캠퍼스가 있어 수업을 지속하며 대학생은 징집되지 않는 특혜를 주었다. 그러나 하인두의 학생증이 학장이 아닌 부장으로 적혀 있어 가짜로 오인받아 전쟁터에 끌려가기를 반복하였다. 이러한 기억은 그에게 트라우마로 남아 거리에서 경찰만 보면 얼어붙었고, 가던 길을 돌아서 가기도 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하인두는 인사동을 근거지로 하여 박서보, 김창열, 장성순 등의 미술가들과 함께 현대미협에서 활동하는 등 당시 젊은 미술가들과 어울리며 새로운 미술에 대한 고민을 지속하였다. 그 와중에 1960년에는 북쪽에서 왔는지 모르고 길에서 만난 친구를 며칠 재워줬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의 불고지죄로 체포되어 6개월간 투옥되기도 했다. 하인두는 출소 후 함께 하던 지인들과의 관계도 멀어지고 공민권조차 박탈당했다. 짧지만 고통스러웠던 투옥생활과 이후 돌이킬 수 없는 본인의 삶은 하인두에게 신경쇠약을 도지게 하였고, 그림조차 그릴 수 없는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게 했다. 당시 하인두는 현대미협에서 함께 활동하던 박서보와 김창렬 등 여러 미술가들이 도불하던 시기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자괴감에 휩싸였다. 신경쇠약을 앓아 발작과 노이로제로 입원을 하기도 했던 그는 늦은 나이에 제자와 결혼 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다시 창작 활동에 몰두할 수 있었다.
종교를 통해 모색한 한국적인 조형미
추상 미술에 대한 대중의 인지도가 높지 않던 시기에 하인두는 끊임없이 추상 미술에 대한 신념을 가지고 조형의 탐구를 시도했다. 그는 해방 이후 천도교에 입문했는데, 이는 그와 자주 어울려 다니던 문인 김동리의 영향이었다. 천도교는 인간의 마음을 중요시하는 교리를 가지고 있는 민족 종교로 전쟁 후 한국의 주체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민족적 움직임이 있었다. 이러한 민족적인 사상은 하인두가 ‘한국적인’ 추상화를 표현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또한 이곳에서 만난 정신과 의사인 김종해는 신경 쇠약에 시달리던 하인두의 회복을 돕기도 했다. 김종해는 불교의 선종을 치료 방법에 도입한 특이한 이력의 의사다. 김종해는 한국의 사찰이나 미술관의 불상을 촬영해 환자들에게 보여주며 환자들이 스스로 내적 영역을 자각할 수 있도록 했는데, 이 치료법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하인두가 많은 도움을 주었으며 자신의 정체성을 모색하는데 일조하였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하인두의 그림에서는 유난히 불상의 머리나, 만다라와 같은 불교문화에서 기인한 듯한 패턴들을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이의 영향으로 세포 분열이 연상되기도 하는 유기적인 형상을 주로 그리기도 했고 전통 색상환인 오방색을 활용해 화려하게 표현하기도 했다. 하인두는 암 투병을 하는 과정에서 기독교로 개종했는데, 이는 내적인 것에서 정체성을 모색하는 천도교나 불교와는 달리 하느님이라는 절대적인 존재를 믿음으로써 삶에 대한 의지를 키워나간 것이다. 기독교로 개종한 이후의 하인두는 보다 밝은 색채와 경쾌한 분위기의 생명력 넘치는 그림을 선보였다. 당시의 작품이 <혼 불> 연작이다. 작품의 이름에서도 느껴지듯 캔버스 위에는 생명의 원천인 빛 에너지가 기운차게 표현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말년의 하인두는 스러져가는 육체를 예술로 승화하듯 커다란 화면에 더욱 화려한 빛을 표현했다. 이 작품들은 그가 단청과 함께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던 교회의 창문인 스테인드글라스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한국적인 추상미술가
하인두는 환란의 시기에 외적인 위기 상황이 닥쳤을 때마다 신경쇠약증으로 일상생활의 영위가 어려울 만큼 예민한 기질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가 표현한 예술은 누구보다 강건한 것을 묘사하고 있다. 추상 미술 자체가 흔치 않던 시절에 추상 미술을 추구하던 자신의 믿음을 바탕으로, 한국적인 것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모색하는, 구도자의 마음으로 조형 활동을 전개해 나간 것이다. 비록 진실을 추구하는 구도자의 신념에 따라 외적인 종교가 달라지긴 했지만, 그의 미술은 미술가가 품고 있는 내적의 힘을 누구보다 진실되게 강렬한 색감으로 표현했다. 결국 그의 예술관에서 종교는 정체성을 찾아가고 이를 견고하고 명확하게 자리 잡는 데 도움을 주는 역할을 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삶의 진실을 모색했던 그가 순수한 마음의 눈으로 보고 그린 그림은 오늘날 누구보다도 한국적인 추상미술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자화상>, 캔버스에 유채, 87.5x61cm, 1957 Ⓒ국립현대미술관

<고전의 율>, 캔버스에 유채, 연필, 92x73cm, 1969 Ⓒ국립현대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