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8 / Art히든 히어로

<바람>, watercolor on panel, 193.9x259.1cm, 2017

글. 김찬용 전시해설가 art_inside@naver.com

빠르게 변화하며 세계화 되어가는 시대 속, 많은 이들이 정체성을 잃고 과거가 아닌 현재만 바라보며 욜로(You Only Live Once)를 외치고 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영국의 전 총리이자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윈스턴 처칠의 명언은 이제 시대의 뒤처진 고루한 사상 취급을 받곤 한다. 한국 근대사의 상처가 담긴 국군기무사령부 터에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 지어져 대중을 위한 공간으로 사랑받고 있지만, 해당 공간이 가지고 있는 과거와 변화된 현재의 의의에 대해 관심을 갖고 미술관에 방문하는 이가 얼마나 될까? 먹고살기 힘들고 바쁘다는 핑계로 언젠가부터 외면하고 있었던 과거의 흔적들 속 숨은 이야기들을 표현하는 작가가 있다. 상처로 기록된 과거의 공간을 현재의 시선으로 재해석하는 작가 이희진을 만나보자.

<아저씨는 어디로 갔을까> 시리즈, watercolor on canvas, 2020

Q. 자신의 작품 세계를 소개해달라
저는 서대문형무소 섯알오름 학살터와 일제 지하벙커 대공분실 등 국내에 있는 역사 장소들을 방문하여 현장감과 분위기를 느끼고 그 장소를 재해석하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무겁고 비극적인 장소들을 어렵게 다루기보단 사회의 작은 한 개인으로서 솔직하고 사적인 시각으로 그곳의 경관과 존재방식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한 경관이 만들어지기까지에는 수많은 이유와 원인이 있다고 생각하여 역사 장소에서 나타나는 현상에 의문을 갖고 작은 부분이라도 구석구석 관심을 가지고 장소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특히 역사적 장소가 역사관으로 재정비되어 세트장화 되어가는 현상이나 산이나 들에 방치되어 사라져가는 경관들을 찾아다니면서 작업에 표현하였습니다.

Q. 작품을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저는 역사 장소를 과거의 장소로 취급하고 싶지 않습니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장소들은 현시대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고 이에 따라 역사 장소들의 보존과 경관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국내에 남아있는 역사 장소를 과거의 장소이자 ‘현재의 장소’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역사 장소의 존재와 존재방식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작업을 통해 사람들이 함께 역사적 장소를 인지할 수 있도록 역사 장소의 경관을 그리고 있습니다. 제 작업의 모든 이미지가 역사 장소의 경관만을 담은 것은 아니지만 그곳에서 일어난 사건과 연관된 이미지들로 역사 장소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Q. 작품 속에 사회적으로 이슈화되었던 이미지가 눈에 많이 띄는데, 작품의 주제를 선택하는 기준이 있는가?
처음으로 역사적 장소를 작업한 곳은 서대문형무소였습니다. 유년기 시절부터 서대문형무소 공원에 자주 놀러 가게 되었는데 그때는 그곳이 실제 역사 장소처럼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1980년대에 서대문형무소가 역사관으로 개편되면서 건물 내부에 새롭게 칠해진 흰색의 페인트는 과거의 옛 벽면을 덮어버렸고 우린 그곳의 옛 벽을 보지 못하는 상황이 만들어졌습니다. 마치 세트장 같은 외관으로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벗겨진 페인트 사이로 드러난 옛 흔적을 봄으로써 세트장 같았던 장소를 역사적 장소로 재인식하게 해주었고 역사관의 경관을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계기로 역사적 장소를 작업으로 다루기 시작했고 나아가 서대문형무소와 비슷한 국내의 역사적 장소들을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대공분실 섯알오름 할살터(4.3사건) 등 사건은 이슈화되지만 정작 실재한 장소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빈 공간’ 이 된 장소들을 선택하여 작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Q. 자신의 작품 세계가 잘 담긴 대표작을 추천해준다면?
현재 진행하고 있는 대공분실 작업 <아저씨는 어디로 갔을까> 시리즈입니다. 이 작품들은 대공분실의 경관을 중점적으로 다룬 작업은 아니지만 대공분실을 방문하면서 가장 궁금했던 질문을 작업으로 풀어낸 작업입니다. 총 15개의 작은 사이즈의 그림으로 이뤄진 이 시리즈는 ‘실종’에 관련된 사건으로 다룬 작업입니다. 제목에 언급된 아저씨는 한 사람만을 지칭하지 않습니다. 경찰들에 의해 동네에서 갑자기 실종된 사람들일 수도, 반대로 현재까지 살아있는 고문 경찰관들일 수도 있습니다. 작업 속 이미지들은 과거에 아무도 들어올 수 없었던 대공분실의 경관과 실종되어 주검으로 돌아온 사람이 발견된 장소의 경관이기도 합니다. 고문이 행해진 장면을 직접적으로 들어내기보단 그 행위가 이뤄진 장소를 그림으로서 대공분실을 표현하려 하였습니다.

Q. 감상자는 이희진의 작품을 어떻게 느끼길 원하는가?
이 질문은 요즘 가장 어려우면서 흥미롭게 생각하게 되는 부분인 것 같습니다. 제 작업은 전반적으로 제 얘기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사회의 큰 이야기를 하는 거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제가 의도한 부분이 어느 정도는 잘 전달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직접적으로 제 생각을 강요하고 싶진 않습니다. 그래서 최근의 작업들은 감정적인 표현을 점점 줄이고 담담하게 장소를 담으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전에 보였던 흘러내는 느낌을 조금 줄이고 세트장 같은 느낌의 시선을 담을 수 있도록 이미지를 연구해나가려고 합니다.

Q. 예술을 통해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
사회에 이슈는 되지만 변함이 없는 문제 혹은 아주 익숙한 문제들을 예술을 통해 다시 새롭게 일깨워 주는 것 혹은 예술을 통해 이전에 드러나지 않았던 문제들을 인지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Q. 회화 외에도 텍스트, 설치 등 다양한 작업을 선보이고 있는데 앞으로는 어떤 형식의 작업들을 준비할 계획인가?
새로운 매체로 작업하는 것에는 늘 열려있는 편이지만 지금 당장은 페인팅을 중점으로 작업을 진행하려 합니다. 대신 기존에는 큰 사이즈의 작업을 진행했다면 최근에는 10호 이하의 작은 캔버스로 다양하게 역사 장소의 경관을 담을 예정입니다.

Q. 현재 작가로서의 가장 큰 고민은 무엇인가?
예전에는 ‘이 주제를 내가 다룰 수 있을까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가졌지만 현재는 그런 고민보단 ‘내 생각과 의미를 어떻게 하면 잘 전달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또 작업의 주제가 무거운 만큼 이미지의 무거움을 조절하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떼, 무리3>, watercolor on panel, 72.7x90.9cm,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