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안진국 미술평론가, 디지털문화정책학 critic.levaan@gmail.com
디지털과 인터넷이 없던 시대를 생각하면 아득하다. 우리의 삶을 크게 변화시킨 디지털과 인터넷. 음악을 듣는 방식을 생각해보라.
이전의 LP(Long-Playing Record) 레코드에서 개인용 컴퓨터(PC)와 CD플레이어가 보급됨에 따라 디지털 방식의 CD레코드로 바뀌더니, 인터넷의 확산으로 파일 형태의 MP3로 급격하게 변하면서 그 물리적 형체마저 잃어버렸다.
지금은 이러한 파일 형태로 접하는 방식도 거의 사라지고 인터넷에 접속하여 원하는 곡을 듣는 스트리밍(streaming) 방식으로 바뀌었다.
문자 기록 방식도 손글씨에서 타자기를 거쳐, 이제는 디지털 방식의 컴퓨터 워드프로세서가 기록 방식의 기준이 되었다.
시각예술은 어떠한가? 필름카메라는 거의 사라지고, 디지털카메라를 이용하여 사진 및 영상을 촬영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작업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제작된 이미지나 영상은 웹 전송에 알맞은 형태의 저용량 파일로 가공되어 페이스북(Facebook), 인스타그램(Instagram), 유튜브(Youtube), 비메오(Vimeo)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Socia Network Service)를 통해 많은 사람에게 공유된다. 그렇다면 오늘날 디지털-인터넷 시대의 예술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아티 비르칸트, 설치 장면, 2016/17, prints on aluminum composite panel, steel stud framing, MDF(출처: http://artievierkant.com)
병합되는 두 세계
인터넷으로 촉발된 웹기술은 1990년대 중반에 웹 1.0 시대로 시작하여 2000년대 중반 개시된 웹 2.0 시대를 지나 이제 웹 3.0 시대로 진화하고 있다. 웹 1.0이 인터넷상에서 단순히 정보를 모아 보여주기만 했던 단방향적 방식이었다면, 웹 2.0은 유저(User, 사용자)가 직접 콘텐츠를 생산하고 공유할 수 있는 쌍방향적 방식이다. 그리고 현재 우리는 유저가 원하는 정보를 제공해주는 지능형 웹기술이 활용되는 웹 3.0의 온라인 환경에서 목격하고 있다. 바로 온라인 쇼핑몰에서 이전의 구매내역을 통해 그와 연관된 정보나 관련 상품을 제공하는 환경을 웹 3.0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디지털과 인터넷을 중심으로 환경이 변하면서 예술도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그리고 인터넷을 기반으로 하는 예술로 변모해왔다. 뉴미디어 아트, 디지털 아트, 넷-아트, 인터넷 아트, 포스트 미디어, 포스트 프로덕션 등의 용어로 불리는 21세기 새로운 예술은 이렇게 탄생했다. 이 변화의 기저에는 디지털의 비물리성이 가져올 이전 체제와 다른 변혁성에 대한 기대가 깔려 있었다. 하지만 당연히 도래할 것으로 보였던 이 기대는 시대가 변하면서 점점 획득하기 어려운 일이 되는 듯 보인다. 스마트폰과 같은 모바일 기기의 등장과 확산은 언제 어디서나 인터넷 접속이 가능한 환경을 만들었고, 이런 온라인 이동성은 포켓몬 고(Pokémon GO)처럼 가상과 현실이 뒤섞인 혼합현실(MR, mixed reality), 다른 말로 증강현실(AR, augmented reality)을 일상화시켰다. 다시 말해 현실과 가상이 뒤섞이는 세상을 만든 것이다.
이제 우리는 가상이라는 비물리적 이미지와 현실이라는 물리적 이미지를 더는 이분법적으로 완전하게 구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디지털-인터넷 예술은 초기 디지털-인터넷 시대에 가졌던 열망, 즉 비물리성이 가져올 변혁성에 대한 열망을 지우며, 디지털-인터넷 시대 이전에 존재했던 물리적이며 전통적인 예술의 형태로 회귀하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과거의 모습으로 퇴행한 것은 아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최근 디지털-인터넷 예술의 모습은 ‘변증법적’ 물리성과 근대성(모더니티)을 보인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이러한 경향성을 지닌 최근 디지털-인터넷 예술은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경계가 불분명하고, 물질성과 비물질성이 뒤섞여 있고, 사이버공간과 물리적 세계의 구분이 와해되어 있다. 이러한 예술을 포스트-디지털(post-digital) 시대의 예술, 혹은 포스트-인터넷(post-internet) 시대의 예술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사회 문화적 차원에서는 포스트-온라인(post-online) 시대의 예술이라고 명명되기도 한다.
아티 비르칸트의 <이미지 오브젝트>와 <물리적 지지대>
인터넷상의 비물리적 데이터가 만들어낸 이미지가 물리적 작품으로 현실 공간인 전시장에 놓인다면 어떤 감정이 들까? 컴퓨터 화면으로 익숙한 비물리적 이미지가 현실세계에 물리적으로 존재한다면? 포스트-인터넷의 대표적인 작가인 아티 비르칸트(Artie Vierkant)는 인터넷을 서핑(surfing)하면서 수집(변조)한 다양한 디지털 이미지를 프린트하여 물리적 실체로 구현한다. <이미지 오브젝트(image objects)> 연작으로 알려진 이 작업은 비물리적인 디지털 데이터 이미지를 일종의 추상 회화나 미니멀 조각과 같은 물리적 형식으로 가공하여 우리 앞에 내놓는다. 다시 말해, 비물리적인 디지털 데이터가 물리적인 제도 미술의 형식으로 재구성되는 것이다. 유사한 방식으로 최근 <물리적 지지대(Material Support)> 연작을 선보이기도 했다.
이렇게 현실세계에 놓인 <이미지 오브젝트> 연작과 <물리적 지지대> 연작은 현실 세계의 물리적 작품과 인터넷상에서 익숙했던 비물리적 데이터를 잇는 유사성과, 두 세계를 구분하는 차이가 뒤섞이면서 우리의 인지를 교란한다. 작품이 가지고 있는 물리적/비물리적 속성은 감상자에게 이중적 경험을 안겨주고 이미지를 바라보는 경험과 감각을 확장시키는 것이다. 작가는 이렇게 만들어진 작품을 전통적인 제도 미술 전시공간에서 전시할 뿐만 아니라, 카탈로그나 책으로 물질화하고, 심지어는 웹사이트에 올려 재(再)비물리적 상태로 바꿔놓는다. 이로써 이 연작은 여러 층위의 의미를 지닌 작품으로 완성되어 간다. 그의 연작은 여전히 ‘인터넷’스럽지만, 또한 물리적 ‘대상(object)’으로 존재한다. 증강현실(혼합현실)에서 느껴지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불분명성이 이 연작에 내포되어 있다.
최근 동시대 예술을 연구하는 이론가 중에는 비르칸트의 이러한 연작이 보여준 메커니즘, 즉 비물리적 디지털 이미지를 제도 미술의 형식을 띤 물리적 작품으로 재구성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이도 존재한다. 그들은 이러한 작품들이 비물리성을 지닌 디지털을 모더니즘의 양식으로 소환하여 합병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새로운 것과 오래된 것의 합병’이라는 긍정 내부에는 ‘모더니즘 관례의 재활용’이라는 부정이 꿈틀거린다. 부정적 견해를 말하는 이론가들은 비물리성을 추구하던 디지털-인터넷 예술가들이 여전히 기존 물리적 제도 미술 전시공간(미술관, 갤러리)에 전시되거나 수집될 수 있는 전통적인 작품형태를 포기하지 않았다고 본다. 그들은 디지털-인터넷 예술가들이 여전히 검증된 전통적 예술의 구조 안에 머무르려 한다고 비판한다. 현실과 가상이 뒤섞이고 있는 시대, 과연 동시대 예술가들은 여전히 전통적 예술의 구조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일까, 아니면 가상과 현실의 경계가 와해된 시대적 상황을 보여주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