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얼 래더맨 유켈리스, <하트포드 청소 : 길 청소하기, 메인터넌스 아웃사이드>, 1973년 7월 23일, 하트포트 소재의 와즈워스 아테니움 미술관 계단과 입구 광장(출처: frieze.com)
글. 안진국 미술비평가, 디지털문화정책학 critic.levaan@gmail.com
여기저기 책이 탑을 이루고 있다. 노트북 옆으로 펼쳐진 책들이 겹쳐서 쌓여 있다. 그 위로 스테이플러로 찍혀 겨우 흩어짐을 면한 문서들이 나뒹굴고 있다. 그리고 메모하기 위한 노트와 몇 개의 필기도구가 책상 위에 흩어져 있다. 이것이 지금 내가 글 쓰는 공간의 모습이다. 나의 공간은 무척 너저분하다. 그래서 간혹 아주 말끔하게 정리된 공간을 꿈꾼다. 누군가가 이 너저분한 공간을 정리해줬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깔끔하게 정리된 호텔, 그 많은 사람이 있어도 언제나 청결하게 유지되는 백화점, 쓰레기가 작품으로 보일 정도로 깨끗한 미술관, 그리고 햇살이 드는 화이트 톤의 말끔하고 미니멀한 집안… 이런 공간에서 글을 쓴다면 글이 훨씬 잘 써질 것 같은 느낌이다. 그래서 이런 말끔한 공간을 동경한다. 하지만 이율배반적으로 이 공간을 떠올리면 불편하다. 이렇게 말끔하게 유지하기 위해 숨어서 땀을 흘리고 있는 그 누군가의 알 수 없는 얼굴이 동시에 떠오르기 때문이다.
‘유지관리(maintenance) 예술’ : 여성, 노동, 가치에 관한 논쟁적 예술
1973년 7월 23일, 예술가 미얼 래더맨 유켈리스(Mierle Laderman Ukeles, 1939~)는 미국 뉴잉글랜드 지역의 코네티컷(Connecticut)주 하트포드(Hartford)에 있는 와즈워스 아테니움 미술관(Wadsworth Atheneum Museum of Art)에서 그 미술관의 안과 밖을 여덟 시간 동안 쓸고 닦았다. 그는 미술관 계단과 입구 광장을 네 시간 동안 글자 그대로 무릎을 꿇고 손으로 닦았으며, 그 후에 또다시 네 시간 동안 미술관 내부의 전시장의 바닥을 기어 다니면서 손으로 문질러 닦았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너무도 기이한 일이고, 한편으로는 너무도 평범한 일이다. 미술관의 실질적인 주인공인 예술가가 작품을 전시하지 않고 미술관 내·외부를 쓸고 닦았다는 사실은 무척 기이한 풍경이지만, 미술관을 티끌 하나 없이 완벽하게 유지하기 위해 청소하는 것은 너무도 평범한 일이다. 유켈리스는 이 행위를 통해 저임금의 관리직 근로자가 가급적 대중의 눈에 띄지 않도록 행하던 유지관리(maintenance) 노동을 공개적으로 행함으로써 수면 아래에 감춰졌던 논쟁적 문제들을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바로 여성, 노동, 가치에 관한 논쟁이다.
<메인터넌스 아트(Maintenance Art, 유지관리 예술) 퍼포먼스>라 불리는 이 작업은 말 그대로 청소였다. 여성인 유켈리스가 행한 청소는 곧바로 가사노동을 연상시켰다. 가정을 깨끗하게 하는 청소와 설거지 등의 가사노동은 대부분 여성이 도맡아서 하게 된다. 남성이 할 때도 있지만, 관습적으로 집안의 가사는 여성의 책임이며, 의무인 양 취급되곤 한다. 이러한 여성의 숨은 노동은 집안을 말끔하고 쾌적하게 한다. 좀 더 시야를 넓혀보자. 사람이 많은 백화점, 극장, 복합쇼핑몰 등을 말끔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도 곳곳에서 숨은 노동이 숨 가쁘게 움직인다. 마치 물 위에서 고고한 자태를 뽐내는 백조가 수면 아래에서 숨 가쁘게 발길질하는 모양새와 같다. 쾌적한 공간을 유지 관리하기 위한 숨은 노동자는 대부분 경제적 약자이며, 그들은 저임금을 받으면서 이 일을 행한다. 유지관리 노동은 결국 사회적 약자에게 배당된다.
그렇다면 유지관리 노동은 예술적 가치가 있는가? 예술에서 상찬받는 가치는 예술가의 창조적 노력이 밑바탕이 되는 ‘개발/발전(development)’의 작업(work)이지, 단순히 숨어서 수행하는 ‘유지관리’의 노동(labor)이 아니다.
하지만 예술을 전시하는 공간은 필수적으로 그 공간을 깨끗하게 유지 및 관리해야 한다. 더 나아가, 많은 공간 운영자는 전시 환경이 작품에 영향을 주는 것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전시공간이 무성(無性)의 중립적인 공간, 즉 진공 상태와 같은 ‘화이트 큐브(White Cube)’가 되길 원한다. 하지만 깨끗한 공간도, 중립적 공간도 ‘유지관리’ 노동에 의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가능하다. 예술에서 전시가 매우 중요하다면, 과연 ‘노동’의 범주에 있는 전시공간의 ‘유지관리’가 예술가의 ‘작업’의 범주에 있는 ‘개발/발전’보다는 하찮은 행위라고 할 수 있는가?
혁명 후, 월요일 아침에 쓰레기를 청소할 사람은 누구인가?
유켈리스는 1973년 <메인터넌스 아트 퍼포먼스>를 선보이기 이전에 이미 ‘메인터넌스(maintenance) 예술을 위한 선언문 1969!’를 발표하며, 전위적인 예술과 문화의 역사가 지닌 맹점을 드러냈다. 그는 이 선언문에서는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혁명 후, 월요일 아침에 쓰레기를 청소할 사람은 누구인가?” 이것은 ‘과연 혁명만이 중요한가?’, ‘혁명 후 그 뒤처리를 중요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을 던지는 우회적이고 상징적인 질문이다. 유켈리스는 1968년에 그의 첫 아이가 태어나면서 예술가의 역할과 어머니의 역할 사이에서 문제의식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69년에 예술에서 예술가의 역할은 문화적으로 중요하고, 어머니의 역할은 사실상 가치 없는 것으로 간주하는 현실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 선언문을 발표했다. 그는 선언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예술가다. 나는 여자다. 나는 아내다. 나는 엄마다. (이 역할의 순서는 무작위적이다) 나는 많은 세탁과 청소, 요리, 수리, 유지, 보존 등을 한다. (지금은 그와 별개로) 예술을 한다. 이제 나는 그저 그런 일상의 일을 할 것이며, 이것을 의식으로 흡수하여 예술로 전시할 것이다.” 유켈리스는 유지관리를 위한 일상의 활동을 예술로 보여줄 것이라고 대담하게 선언했다.
따라서 <메인터넌스 아트 퍼포먼스>는 유켈리스가 수행해야 있던 청소, 요리, 세탁, 양육 등 가사노동에 대한 사유에서 출발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결혼과 출산 후 직면하게 된 가정의 ‘유지관리’로 인해 소위 ‘예술’이라고 명명된 활동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 상황 속에서 그는 전위적 예술과 문화조차 외면하고 있는 노동을 발견한 것이다. 하지만 그가 보여준 <메인터넌스 아트 퍼포먼스>는 단순히 가사노동에만 머물러 있지 않다. 유지관리의 가치와 이 일의 수행자에 대한 사유까지 확장되어 있다. 왜 이 일은 무가치하게 여겨지는가? 왜 이 일을 담당하는 계층은 가부장제 속에서 억압받는 여성이거나, 이와 유사하게 사회적 하층 계급인 흑인이나 유색인종 등인가? 왜 이러한 ‘유지관리’는 ‘작업/작품(work)’이 되지 못하고 ‘노동(labor)’에 머물 수밖에 없는가?
이러한 질문들 속에서 우리는 <메인터넌스 아트 퍼포먼스>가 단순한 청소가 아니라, 가사노동을 ‘작업/작품’으로 인정할 것을 요구하는 ‘페미니즘’ 예술이며, 유지관리 노동에 의해 유지되면서도 정작 그것을 최대한 은폐하려는 미술(관)의 권력을 드러내는 ‘미술제도비판’ 예술이며, 사회 계급에 따른 노동의 서열화를 엿볼 수 있는 ‘사회비판’ 예술임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소위 ‘예술은 무엇인가’라는 ‘예술의 가치’에 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단순해 보이는 그의 퍼포먼스는 이렇듯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는 결코 단순하지 않은 작업이다.
다시 한 번 묻는다. “혁명 후, 월요일 아침에 쓰레기를 청소할 사람은 누구인가?” 누군가는 혁명 후 그곳을 정리해야 하고, 그것 또한 중요한 일이다. 선두에 서서 외치는 자의 소리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뒤따르는 자, 함께하는 자가 없으면 선두의 외침은 공허한 헛발질일 뿐이다.

미얼 래더맨 유켈리스, ‘하트포드 청소:길 청소하기, 메인터넌스 인사이드’, 1973년 7월23일, 하트포트 소재의 와즈워스 아테니움 미술관.<출처=www.arte-util.org>

미얼 래더맨 유켈리스, ‘하트포드 청소:길 청소하기, 메인터넌스 아웃사이드’, 1973년 7월23일, 하트포트 소재의 와즈워스 아테니움 미술관 계단과 입구 광장<출처=timeline.com>